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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POSTS

  1. 2008.07.15 iPhone 3G를 처음 구경해 보다 2
  2. 2008.07.08 오래된 필름을 현상하며 2
  3. 2008.07.04 이름에 얽힌 사연 2
  4. 2008.06.25 6.25 2
  5. 2008.06.22 으.. 공부 1
  6. 2008.06.21 Bowing
  7. 2008.06.13 변하지 않는것은 죽어가는 것이다.
  8. 2008.06.09 미국사람 집에 놀러가다
  9. 2008.06.01 한국, 돌아가야 하나? 1
  10. 2008.05.29 색시 출장을 떠나다

iPhone 3G를 처음 구경해 보다

Posted 2008. 7. 15. 03:2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요즘 미국은 iPhone 3G가 새롭게 나와서 난리다.
기계 좋아하는 나 이지만, AT&T에서만 발매하는 관계로 무시하고 살고 있는 중.

그러던중 우연치 않게 새롭게 나온 iPhone을 보게 되었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Judi 아줌마 만나서 영어공부 하고 난 다음에 점심 먹으러 피자집으로 갔다.
밥을 먹고 나니까 너무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옆집으로 커피 마시러 들어왔다. (무려 2.34불이나 주고 아메리카노 마셨다. 평소 생각하면 과소비다. 한국 생각하면 무진장 싸다고 하겠지만 여긴 밥값 비싸서 밥사먹고 커피까지 마시면 한끼에 1만원돈 훌쩍이다.) 무려 2.34불이나 주고 마시는 커피 이기에~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 커피샵에서 뭉개면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지원이는 이런데서 어떻게 공부가 되냐고 하지만, 나는 어디서나 공부가 가능하다. 심지어 길거리에 쭈구리고 앉아서도 보고 싶은건 다 본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어떤 아져씨 - 거의 울 아버지 보다 조금 더 나이 드신 듯 하신 -가 내 iPod Touch를 보면서 iPhone이냐고 물어 보시더군. 그러면서 이런 저런거 물어 보시는데 나이 드신분이 새로운 전화기 사시고 즐거워 하는 모습 보면서 정말 미국에서 iPhone이 인기가 대단하긴 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재미있는게 지원이가 한국 가고 난 다음에 내가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는 관계로 미국 사람들과 대화 할 기회가 많이 늘어난것 같다. 지원이 있으면 항상 지원이가 다 해결하고, 난 조용했었으니까. 내가 이러고 다니니 지원이는 방학 끝나고 나면 내 영어실력 많이 늘었을꺼 같다고 한다. 난 도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렸을때 부터 영어할때 두려움 같은건 없었다. 말도 안되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나 이기 때문에 영어밖에 못하는 미국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하며, 한국말도 잘하고 영어도 이정도로 잘 하는 내가 더 대단하다는 자부심으로 부끄러운것 모르고 영어 사용하고 있다. ㅋ

그래도 이렇게 커피샵에서 옆에 앉은 아저씨랑 이런저런 얘기 하는건 즐겁다~
난 뻔뻔 하니까!!!

오래된 필름을 현상하며

Posted 2008. 7. 8. 03:05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어제 오래전 부터 카메라에 들어있던 필름을 꺼내어 현상을 했다.
카메라도 참 오래된 녀석이지. 나보다는 젊겠지만 나와 같이 나이를 들어가는 카메라.
이 카메라 기종이 1987년도 부터 생산이 시작 되었으니 대략 20년 정도 된 카메라 일 듯 하다.

프린트된 사진을 보니 첫 사진은 아틀란틱 시티에서 찍은 사진. 지원이 친구가 와서 함꼐 찍혀 있으니 거의 1년 반? 그정도 시간이 흘러간 필름이었다. 중간에 필름에 빛도 들어가 버리고 해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몇장 있었는데 3장만 올려 보려고 한다.

두장은 아틀란틱 시티에서 찍은 사진.
지원이랑 미국와서 바닷가에 간 것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지원이 친구가 놀러온 덕분에 대서양으로 놀러 갔다. 원래 아틀란틱 시티는 동부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도박장이 있는 곳이다. 뉴욕이나 필라델피아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도박을 하고 싶을때 가는 곳이다. 개인적으로 도박장을 싫어 해서 별로 가고 싶지는 않지만, 도박장 구경도 못 해보셨던 순진한 두 처자 때문에 방문한 곳. (나는 영어 같이 배우던 동생들과 한번 가 보긴 했었다.)
바다에서 찍은 사진중 맘에 드는 컷이 있다.

한장은 지원이 독사진. 바다를 배경으로 한 모습이 참 아름답다. (얼씨구 자기 색시라고 너무 하는거 아냐? 그래도 이뻐 보이는걸 어쩌란 말이냐? 이래서 천생연분인가 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몰래 찍은 아내, 지원







































한가지 아쉽다면 조금더 낮추어서 발 아래쪽으로 땅이 더 나왔으면 했다는거.
아직까지는 실력 부족. (사실은 몰래 찍은 사진이다. 망원으로 당겨 찍는동안 살짝 위로 올라간듯)

그 다음 사진은 친구랑 둘이 찍어준 사진. 그 친구는 그때 이후로 못 만나고 있다.
아 미국은 넓고도 넓어라. 그 친구는 (은경이지?) 지금 한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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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과 은경























마지막 사진은 지원이랑 필라델피아에서 필름 페스티벌 할때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말 오랜만에 둘이서 시내 나들이를 했었다. (공부에 지친 두 사람에게 단비 같았던 시간이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있었는데 너무 평화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저 있었다. 그날따라 가져간 렌즈가 35mm 렌즈 하나였던지라, 망원으로 찍고 싶었던 사진을 광각으로 찍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맘에 꼭 드는 사진이 나와 버렸다. 개인적으로 제목을 붙여 보라고 한다면 이렇게 붙이고 싶다. "개, 꽃향기에 취하다."

개, 꽃향기에 취하다.

개, 꽃향기에 취하다



사실 필름 하나를 더 맡겼는데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half camera'를 작업자가 몰라서 설명해주고 오느라 찾아오지를 못했다. 하지만 친절한 직원이 재미난거 배웠다고 신나해서 웃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있다가 저녁에 가서 찾아올 것이다.

오랜만에 느끼는 필름의 즐거움. 찍을때 마다 돈이 든다는것과, 가끔 너무 오래 방치된다는 것 빼고는 필름의 매력에 다시한번 빠져든다. 가끔은 가볍게 필름 카메라만 들고 다녀볼까?

Ps. 사진을 누르시면 조금 더 큰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사진은 직접 눌러 보세요.



이름에 얽힌 사연

Posted 2008. 7. 4. 11:4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내 이름은 홍다우미. 성이 '홍'이고 이름이 '다우미'이다.
어릴적에 나는 왜 내 이름만 3자나 되는지가 궁금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름석자는 자기 성을 포함한 것이고, 나는 순수한 이름만 따져서 3글자라는 것이다.)
수능 모의고사를 볼때도 이름 적는 칸이 3자리 밖에 없어서 성적표에는 언제나'홍다우'라고 찍혀 나왔던 시절에 살아온 나로서는 세상을 참 불편하게 살아 왔었다.

그런 내 이름에 얽힌 스토리도 몇가지 있는데 그냥 생각나서 적어본다.

첫번째 이야기.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회에서 수양회를 가야해서 미리 접수를 해 놨었는데, 그 접수를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대신 해 줘서 생겼었다. 수양회 가기 전주에 교회에 모여서 방배정 결과를 알려 주었는데 남자들 이름을 다 불렀는데 내 이름이 없었다. 접수는 분명히 했었는데. 그래서 선생님께 어쭈어 봤더니 내 이름은 여자방에 들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용히 있다가 여자방에 들어가 봤을것을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당시 중1이었던 나는 그런 말도 안되는 경험을 하기 싫었었다. 아내한테 이 얘기 했었다가 혼나긴 했다. ^^; 지금은 가고 싶냐고? 물론~ 지금은 싫다. 남자방도 싫다. 그냥 부부방 줘요!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이 여자이름 같긴 한가보다. 물론 나는 항상 주장하곤 한다. 내 이름이 최초이니 무조건 남자 이름이라고. 하지만 네이버, 다음, 구글을 하다보면 '다우미'란 이름을 가지거나 애칭을 쓰는 사람은 모두 여자다. 흠.. 분명 내가 처음인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여자란게 좀 어색하긴 하다. 그래도 난 남자다.

두번째 이야기.
누구나 가지게 되는 별명. 그런데 나는 이름덕분에 참 다양한 별명이 있었다. 첫 별명은 홍당무. 보면 알겠지만 이름가지고 만든 단순한 별명이다. '다'에다가 '우'자의 'ㅇ'을 뭍이고, '미'자의 'ㅁ'을 'ㅜ'에 붙여 놓은거다. 그게 내 첫 별명이었다. 그리고 국민학교때 선생님이 '다듬이돌'이란 별명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당시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도 문제선생인 듯. 아동 학대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자로 끝나는 3음절 단어는 다 내 차지였다. 아.. 그러구 보니 국민학교 시절 '다리미'란 별명도 있었는데 까묵었다. 암튼 그당시 '미'짜로 끝나는 단어중에 지금도 기억남는건 '두루미', '바구미'가 있는데 그중에 '바구미'는 지금도 약간 변형되어 내 친구 영탁이는 나를보고 '굼바'라고 부른다

세번째 이야기.
내 이름은 '한글'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 뜻은 '~답다'의 명사형으로 어떤것의 이상향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내가 생각해도 내 아버지께서는 나에대한 기대가 무척이나 크셨나 보다. 암튼 이 이름에 대해서 중학교 1학년때 한문 선생님께서는 필히 한자로 같은 뜻이 있는 이름을 지어 주시겠노라고 하셨지만 중학교를 졸업할때쯤 선생님께서는 그런 한자는 없다고 하시며 포기 선언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행이다. 그때 선생님의 호언 장담에 친구들이 장난삼아 음율만 맞추어 지어준 이름이 많을'多', 비'雨', 아름다울'美' 였다.

이름 덕분에 생긴 에피소드.
오늘은 여기까지.

6.25

Posted 2008. 6. 25. 01:0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아아~ 잊으랴 어찌우리 그날을...

오늘이 무슨날인줄 아는사람???
그렇습니다~ 오늘은 6.25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날이라고들 하죠.
사실 6.25일이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날은 아닙니다.
민족의 비극은 일제시대를 지나서 독립을 하게 될 즈음하여 소련의 힘을 우습게 보던 미국이 부랴부랴 한반도를 반토막 내서 나누어 놓았던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고 6.25는 그 결과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의 최 우방이라 생각되는 미국의 어이없는 바보짓 덕분에 우리는 나라가 두쪽나 버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역사공부고, 그다음으로 6.25는 내 친구녀석 생일. 조준희라고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까지 줄창 같이 다닌 녀석 생일. 그러니까 생일축하한다 준희야.

그리고 2005년 이래로 나한테 앞의 두가지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생겼으니 그건 바로 지원이랑 다우미가 결혼한 날이라는 것이지!!!! 여기서 잠깐. 왜 6.25에 결혼했냐고?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냐고? 흠... 솔직히 말해서 2005년 6월 25일은 토요일이었어. 그리고 울 색시가 미국서 공부를 하다가 졸업식 하고 오셔서 잠시나마 결혼 준비할 시간을 가지려면 그때쯤이 가장 적당 했다는 사실. 덕분에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되었다는 사실!

참 우여 곡절끝에 결혼한 우리다.
결혼 스토리 말해주면 미국 사람들 마져도 드라마틱 하게 결혼했다고 꺅꺅 거린다구요.
나는 죽어도 결혼 안 하거나, 하게되면 35세 이후에나 하겠다고 맹세까지 했던 지원이를 20대 중반에 결혼시켜버린 처가의 영웅이 되었고, 울 지원이는 죽어도 공부 안 하겠다고 우겨대던 신랑을 미국에서 석사를 하게 만들어서 시댁의 영웅이 되었지. 우리 민족에게는 6.25가 분단의 골을 깊게 파버린 가슴아픈 날이 되었지만, 우리 두 가정에게는 6.25는 두사람이 함께, 두 가정이 함께, 그리고 내 주위의 모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 날이야. 사실 어떻게 보면 내 생일보다도 더 기쁜날.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두사람, 올 결혼기념일에도 또 떨어져 있게 되었어. ㅠ.ㅠ

작년에는 지원이 학회 때문에, 올해는 지원이 연구 때문에.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내가 지원이 나쁘게 만든거 같은데... 사실 작년엔 내가 따라가지 못할 분위기 였지만, 올해는 나도 내 사정 때문에 혼자 미국 남아 있는거니 내 탓이 더 크지.) 그래서 너무 아쉬워서 이렇게 그날을 기념하는 글을 남겨요.

이제는 둘이 떨어져 있던 날보다 함께한 날이 더 많아져 가네. 전에는 떨어져 있던것이 더 익숙했는데, 이제는 떨어져 있는것이 어색해진 우리. 이 방학이 어여 끝나서 다시 함께할 시간을 기다리면서 내 색시를 기다립니다.

으.. 공부

Posted 2008. 6. 22. 12:0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솔직히 공부는 내 취미가 아니다.
오죽하면 내가 미국에서 석사를 시작하고, 그 공부를 따라가니 울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적을 보았다고 놀라셨을까? 암튼 나는 공부를 참 싫어한다. 아니, 누군가한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배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리고 한국에는 참 가르칠 줄 모르는 분들이 교편을 많이도 잡고 계신다.

내 전공하고 전혀 상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참 좋아하던 과목이 있다. 그건 국사.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긴다. 그 국사란 것이 중학교 2, 3학년때 배운 것으로 대학 입시때 까지 써 먹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난 그 시간에 '국사'만 배운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서 현대를 읽는 눈을 배웠던 것 같다. 다시한번 당시 국사선생님이였던 '이종호'선생님께 참 감사드린다.

요번에 대학원에 와서도 여러 type의 교수님들을 만났다. 몇몇 분들은 교수'님'이란 호칭으로 부르고, 몇몇 분들은 그냥 교수라고 호칭하고 산다. 여기서 '님'이란 호칭을 붙여 드리는 분들을 보면 그분들 참 존경할 만 하다. 학생들한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노력하시는게 내 눈에도 비춰질 정도니 말이다. 그분들의 가르침이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공부 하고 있지도 못할 듯 하다.

여태 대학원 다니면서 5과목을 끝냈다. 5과목을 끝내면서 놀라운것은 난 참 모른다는 것이다. -도데체 모르면서도 5과목중 4과목을 A 받는건 먼지 모르겠다. - 분명한건 내가 대학교 4년동안 참으로 공부를 안 했다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 학기초마다 나는 홍역을 치루곤 한다.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가정하고 지나가는 교수님들의 수업 속에서, 그 기본적인 것들을 내것으로 하기 위해서 하는 몸부림은 참 참담하다. 지금도 교수님 한분이랑 아나로그 회로에 대해서 공부 중이다. 앞으로 할 만한 프로젝트를 위해서 기초 다지기 작업중이다. 그런데 이거 대학 다닐때 배워 놨던건데, 그떄 이 과목도 엉망으로 들어놔서 내 기억에 C-아니면 D+ 정도로 때우고 끝냈던 과목 같다. 이녀석을 다시 책을 붙잡고 공부 하자니 모든것이 새롭다. 단지 그때와 다른것이 있다면, 한글로 된 책을 보면서도 이해 못 했었는데 지금은 영어로 된 책을 읽으면서 이해를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중간중간 이해를 못해서 울쌍 지을때가 많긴 하다.- 그래도 힘들긴 하다. 수업이 아니라 내 스스로 공부하고, 그 공부한 내용으로 교수님과 대화를 해 나가야 한다는것이 엄청난 부담이긴 하다.

앞으로 대략 3학기를 더 들어야 할 듯 하다. 앞의 두과목이 비자 문제가 풀리기 전에 들은 수업이라서 이 6학점은 버려야 할런지도 모른다. 한국에 바로 돌아간다면 전혀 문제 없을텐데, 미국에 몇년 더 있을 계획인지라 이게 나한테 큰 방해가 되긴 한다. 암튼 이 3학기 동안 또 내가 안 해 본것들을 해 나가야 한다. 조금 두렵긴 하다. 원래 예정에 없던 논문도 써 봐야 할 것 같다. 이 두렵고 싫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은 다름아닌 내 색시 지원이다. 오죽하면 울 어머니는 내가 지원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 싫어하는 공부도 같이 한다고 놀리실까. 그런데 지금 지원이가 옆에 없어서 능률이 잘 안 오른다. 아무말 없이 옆에서 공부만 같이 해도 힘이되는데. 오늘따라 지원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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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wing

Posted 2008. 6. 21. 22:52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바이올린의 기본은 활을 어떻게 잡느냐, 그리고 그 활을 어떻게 긋느냐 이다.
하도 오래전에 배운것이라서, 그리고 어린 그 당시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서 가장 아쉬운 것이 활을 사용하는 것과, 운지법이다.
영어로 활을 긋는것을 bowing이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따온 동영상인데 참고 자료로 남겨 놓는다. (매번 찾으러 가기도 구찮으니)

변하지 않는것은 죽어가는 것이다.

Posted 2008. 6. 13. 03:39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오늘은 결론부터 쓴 다음에 글을 써 내려가고 싶다.
오늘 내가 적어 놓고 싶은것은 '변하지 않는것은 죽어가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내 입에서는 '그건 절대로 안해', '죽으면 죽었지 내가 그딴것 할 줄 알아?'라는 말들이 끊임없이 나왔다. 그때 나의 현명한 어머니께서는 절대라는 것은 없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는 어머니 말씀이 우습게 들렸었는데 - 어머니 죄송해요- 요즘은 진리로 다가오는 것은 왜 일까?

사실 따지고 보면 진리라는게 세상에 있을까? 하나님을 믿는 나로서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이 홍다우미의 죄 때문에 이땅에 오셔서 대신 죽어 주셨다 라는 것 빼고는 진리는 없다라는 것이다. 수학은 그럼 진리인가? 간단한 산수인 1+1=2라는 것은 사람들의 약속이지 진리는 아니다. 이 무수한 약속들이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진리인 양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위에다가 변하지 않는것은 죽어가는 것이라고 무시무시하게 써 놨는데, 저것도 진리라고 말하기엔 좀 웃기는 말이다. 하지만, 변화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더이상 발전이 없고, 발전이 없으니 죽은것이랑 다를것이 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니 저렇게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본다. 그 발전이란 것도 큰것을 바라는건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의 말도 귀 기울여 들어보고, 다른사람의 마음을 한번 해아려 줄 수 있다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그리고 내일은 또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릴적에는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느껴 지지만 - 경험의 부족은 어쩔 수 없다 - 나이가 들어서도 다른사람을 배려 못 하는것은 왜 일까? 한국사회는 전형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듯 싶다. 그것이 특히나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대할 때 더더욱 그런것 같다. 그리고 희안하게 그것이 자신의 가족일 경우 더 그런 것 같다. 도데체 공자님의 말씀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수입 해 왔을때 부터 나라 꼴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먼져 윗사람이 품어주고 헤아려 줬을때 아랫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부터 우러 나오는 존경이란 것이 나오게 된다. 바보, 멍청이가 아닌 다음에 사랑해 주는 존재에 대해서 처음부터 반발감을 가지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 미안하다.. 바보도 사랑해 주는 존재는 따른다- 하지만, 그 단순한 진리조차 깨닿지 못하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싫어하는 분들이 대한민국에 아직도 존재 한다. 그렇게 짜증 내면서 화내면서 아랫 사람들을 대하면서 자신을 공손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짜증내는 사람이 있다는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SBS에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가 있다. 참 드물게 SBS에서 맘에 드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그 프로를 자세히 보면 제보를 할때는 아이의 문제점을 가지고 제보를 한다. 그리고 그 아이의 상태를 진단한다. 참 다양한 문제아 들이 총 출동한다. 그런데 결론부로 다가 갈수록 느껴지는 것은, 아이가 저런 행동을 하는데 부모의 책임이 99.9999999% 있다라는 것이다. 아이를 어떻게 변화 시키는가? 그것은 부모가 변하니까 간단하게 해결 되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 시키고, 약속을 지키고, 아이의 말을 들어주니 보통 1주~2주 사이에 아이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난 그곳에 나온 부모님들을 존경한다. 부보들도 바보가 아닌이상, 그 프로에 나가면 본인들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평생 자신이 살아오던 방식을 바꿔야만 한다는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 용기있게 한발 내딪어서 스스로를 변화 시키는 것이다. 난 그래서 그분들을 존경한다. 진심으로 자녀를 사랑하기에 자신의 단점을 진단받고 고쳐 나가는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이 바뀌려면 어른들이 먼져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 대한민국의 아버지가 된 대통령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들의 아버지 들이 역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많은 분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인정 못하시는 분들도 제법 계신다. 우리는 기다려야 하는가? 세월이 그들을 자연적으로 도퇴 시킬때 까지? 아니다. 그래도 가끔은 아래서 먼져 변화해서 그분들을 변화 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위에서 변화해서 1~2주면 쉽게 아래사람의 변화가 생기는것과 비교해서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릴지라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분들에게도 절대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미국사람 집에 놀러가다

Posted 2008. 6. 9. 09:3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사실 지원이 교수님댁에 놀러 가 본 적은 있지만
(파티에 초대 되서 가긴 했지만 놀러가는 기분 보다는 뭔가 의무감에 가는 것 같은 느낌?)
혼자서 미국사람 집에 가보긴 처음 쩝.

사실 지난주에 교회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언 여자가 말을 걸어 오길래 냉큼냉킁 말했었는데
오늘은 자기 모임있어서 간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 갔었다.
알고보니 어린이 사역을 하는 목사님 댁에서 모임이 었다.

미국에 있는동안 항상 지원이가 대화를 주도 했기 때문에 난 그냥 듣고만 있었는데
온통 미국사람들 속에 싸여 있다보니 ^^;
무진장 긴장되고 무진장 힘들었네요

여러명 있었는데, 그사람들 보니 역히 한국 사람들이랑 다른 문화구나 싶기도 하고.
집에 가자마자 목사님이 권하는 알콜?
어짜피 입에도 안 대는 알콜이니 pass하고 Ice Tea마시긴 했는데, 말로만 듣던 예배후 음주를 즐기는 목사님 모습이 신선 그 자체! ㅋ 문화의 차이는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여러가지 이야기 나눴는데 백인들도 참 소란스럽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휴~ 그나저나 사람이름 외우는데 무진장 약한 난 이제 저사람들 이름 어케 다 외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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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사진은 그 집이랑, 집 앞에서 본 꽃이다.
아직은 사진 같이 찍자고 하기엔 부끄러운... 소심쟁이다.

한국, 돌아가야 하나?

Posted 2008. 6. 1. 07:15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구 왜 안죽나 하는 생각을 배 봤다.
세상에... 그게 내 조국의 대통령을 보고 든 생각이다. 내가 미친걸까?
저런 인간도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어의가 없을 뿐이다.

아내가 화 낼때도, 그래도 내 나라에서 내가 배운것 써 먹으면서 국가에 이바지 해야지 하면서 달래 왔었는데, 이제는 내가 지쳐간다. 저런 대통령을 위해서 내가 가진 기술을 쓰기도 싫고, 그녀석이 엉뚱한테 삽질할 돈 만들어주기 위해서 세금 내고픈 생각도 안든다. 국민을 위해 쓰라고 낸 세금가지고 국민을 괴롭힐 생각만 하는 대통령이 과연 대통령 자격이 있는건가?

일단은 지금 대통령 임기 마칠때 까지는 한국에 안 돌아가는것으로 마음이 확실히 굳어 버렸다. 그럼 내나이 39이 되나? 아우 짜증나.... 내 꽃같은 30대는 미국서 버텨야 하겠군..
나중에 볼일도 없겠지만 만난다면... 침이라도 벹어 줘야겠다.

무슨 어른한테 그런짓 하냐고?
당신도 아래 사진같은거 봐봐... 이번 시위도중 맞아서 피흘리는 사람이야.
쇠파이프도 없고, 화염병 없어도 저렇게 패도록 지시한 대통령이야. 그것도 나랑 같은 기독교라고 우기면서... 이건 뭐 십자군 원정이랑 다를게 머람???? 완전 대한민국의 암흑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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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시 출장을 떠나다

Posted 2008. 5. 29. 08:56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논문 proposal defense를 무사히 마친 우리 색시께서
그 이후 행보를 하기 위해서 출장 가셨습니다.
무려 3개월이나 저를 미국에다 버려두고
현장으로 떠나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

원래 필라델피아 공항에 데려다 줄 때는 단 한번도 주차 안 시키고 그냥 공항에 내려주고, 태워 오기만 했었는데, 이번엔 너무 오래 떨어져 있게 되어서 주차 하고 짐 부치고 하는것 모두 도와주고 왔습니다.

여보야 잘 다녀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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