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Results for '우리들의 추억/즐거운 추억들'


25 POSTS

  1. 2010.04.07 남편! 1
  2. 2009.05.14 오랜만에 아내 사진
  3. 2009.04.06 힘들고 어이가 없어도 웃자! 1
  4. 2008.12.14 멋진 남자들 1
  5. 2008.08.22 드디어 기다리던 서류를 받았다. 1
  6. 2008.08.10 워싱턴 다녀오는 길 3
  7. 2008.07.04 이름에 얽힌 사연 2
  8. 2008.06.25 6.25 2
  9. 2008.06.22 으.. 공부 1
  10. 2008.06.09 미국사람 집에 놀러가다

남편!

Posted 2010. 4. 7. 01:37 by 쪈
태어나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정말 오빠는 날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게 아닌가 싶을만큼, 늘 넘치는 사랑 부어주고 배려해주고 행복하게 해 줘서 너무 고마워. 

오늘도 정신없는 하루이지만, 그래도 생일날만 느껴지는 설레임이 하루종일 함께하길~ 

이따 저녁에 봅시당~~~ 

사랑해!!!!  

오랜만에 아내 사진

Posted 2009. 5. 14. 10:47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이 꽃을 내가 아내한테 준 것이면 좋겠지만, 우리는 꽃 보다는 맛난 밥에 약한 부부다.
살자쿵 아쉽긴 했지만, 오늘 축하해줄 사람이 있어서 꽃을 샀다. 

사실~ 미국에서 꽃을 살때는 미국 꽃집에 가는건... 좀 그렇다. 
참 센스 꽝이다. 미국애들이 그렇지 뭐. 

암튼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꽃집에서 이쁜녀석 사다가 시상식 시작하기전에 카메라 테스트 한컷. 오랜만에 카메라를 손에 쥐었더니 어색함이 느껴진다. 큰일이다. 

그래도 나의 아름다운 모델은 꽃과 너무 잘 어울려서 닭살스럽겠지만 두컷 올려 본다. 
두컷 모두 약간의 색 보정을 해 봤다. 하나는 좀 과도하게, 하나는 색을 죽여서 만들어 봤다.

나름 다른 분위기. 
중요한건 뭘 해도 내 색시는 이쁘다는거. 
역시 난 팔불출이다. 


힘들고 어이가 없어도 웃자!

Posted 2009. 4. 6. 06:1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토요일에 지원이와 함께 근처 공원에 가서 것다가 찍은 사진.
요즘 바쁜 시간들이지만, 적어도 한달에 한번은 공원을 걷자고 약속 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걷다 왔습니다.

세상이 참 어지럽게 흘러가고, 실망도 많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삶을 망칠수는 없는 노릇.
더 굿센 마음으로 살고자 웃는 사진한번 올려 봅니다.

그런데 사진 찍어서 직접 보니 제 조카들 사진에서 보던 표정인듯.
오늘로 34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아져씨라고 믿어 지는 표정입니까?

난 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어린 아이일 뿐입니다.

Ps. 사진 컨셉이 궁금하시다면, 포인트는 귀 위의 꽃. 봄 맞이 광남이 표정? 세상사의 고단함을 잠시 미쳐서라도 잊고 싶다는 나의 의지?

멋진 남자들

Posted 2008. 12. 14. 04:4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사실, 남자로서 여자 연예인을 좋아하는게 정상같지만, 개인적으로 딱히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은 없다. 하지만 연예인 아닌 연예인을 좋아하고 있다. 그것도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말이다.

그의 직업은 '팝 칼럼리스트', 그리고 현제는 방송인으로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있는 김태훈 씨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공동 블러그도 운영하고 있고, 전에 영화 잡지사 편집장도 하셨던 최광희 씨. 두 남자의 매력이 무었일까?

두 사람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이 있다. 
먼져 김태훈씨. 어찌보면 형님이라고 부르는게 더 편하기도 하다. 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가 KBS에서 UMB라디오 진행을 하던 때 부터이다. 당시 나는 미국에 와서 영어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떄 였다. 난생 처음으로 살게된 미국 생활, 그 가운데 즐거움이 생긴 것 이었다. 
학교를 오가는 차 속에서 podcast로 다운받은 그의 방송은 나와 내 아내를 즐겁게 해 주었고, 아주 가끔이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할 때에는 생방을 들으면서 콩으로 문자를 보내 보기도 했었다. 가끔 올리는 사연을 읽어 주기도 하고, 그런 즐거움에 운전하며 즐겁게 웃기도 했었다. 어릴적에 듣던 라디오에 대한 즐거움이 새록새록 커져 나갔으며, 그리고 그가 참 대단한 DJ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을 잘 챙겨주었으며 잘 기억해 주었다. 

사실 오늘 오랜만에 그가 하는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일요일 새벽에만 딱 한시간 방송을 하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마음에 '다우미'라고 남기면서 기억 하실런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방송 끝나갈 때에 외국에서 '홍다우미'씨도 듣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 이사람 날 기억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기억 해 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하지만 그가 최고의 DJ라고 감히 말 할수 있는 이유는 다른곳에 있다. 그는 원래 팝 칼럼리스트다. 단순히 음악을 듣고, 뮤지션을 찬양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공부하고, 그 음악과 함께 그 이면의 사연들 까지도 알아보고 사람들에게 소개 해 준다. 그리고 책도 많이 읽었는지, 참 많은 지혜들을 쏟아 내 놓는다. 필요한 정보를 주기도 하며, 때로는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 기운을 돋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최고 장점은 따스한 목소리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배철수, 김기덕 등의 전문 DJ와 어께를 나란히 하거나, 그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DJ의 자질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또한명의 남자. 바로 최광희 씨다. 사실 처음에는 그가 그렇게 이뻐 보이지 많은 않았다. 내 기억에 처음으로 그에 대한 반감이 생긴것은 모 영화 때문이었다. 그의 비평이 귀에 좀 거슬렸었다. 전문가 운운 하는 그의 말에 빈정이 상해서 맥에서는 글 남기기도 귀찮은 KBS홈페이지에 글까지 남기면서 따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정중하게 사과를 남겼었다. 처음으로 그런 사과를 받으니 기분이 묘 해졌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의 비판에 대해서 귀를 열고 듣는 사람이다. 또한 말도 안되는 것에는 힘것 싸울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요즘 다른 사람의 비판을 무지막지하게 실어 하시는 청기왓집 누구랑은 너무나도 다른 멋짐 모습이었다. 

그 이후에 최광희씨에 대한 내 편견이 조금씩 벗겨졌었다. 
사실 나보다는 내 아내가 최광희씨를 더 좋아한다. 내 아내 덕분에 그의 글을 더 많이 읽게 되었는데, 덕분에 그가 더 멋있게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 좋다고 느겨졌었다. 세상을 안타까워 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졌었다. 그런 사람이 아직까지 존재 하기 때문에 그래도 한국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싶기 까지 했다.

영화판 쪽에서 상업주의에 물들어 가는 그런 틈에서도, 비평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쓴소리를 낼 수 있는 그가 있기에 즐겁기 까지 하다.

어찌보면 메이져가 아닌 두 사람이지만, (죄송합니다.) 두분은 편당 수천, 수억을 받는 어떠한 연예인들 보다 훨씬 멋진 사람들이다. 또한 토익 950은 기본으로 넘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모 신문사 기자 보다도 훨씬 멋진 사람이다. 

두분, 더 큰 영향력을 가진 DJ와 기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서류를 받았다.

Posted 2008. 8. 22. 03:4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오늘 교수님이 만나자고 해서 (또 아침에 메일 보내셨다. 2시 이후에 학교 오신다고 했는데 2시 47분이건만 아직도 학교에 안 나타나고 계신다.) 학교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Biswas교수님을 만났다. 보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Speaking Test 받았냐는 것! 이런.. 무슨 소린야? 아무런 메일 못 받았는데? 하니까 니 TA 승인 났으니 3층 가서 서류 받아다가 Speaking Test부터 받으란다. 에구구.. 이거 갑자기 떨리는걸? 앗.. 지금 교수님 오셔서 교수님 만나고 계속 써야 겠다.

교수님과 미팅하고 집에와서 마져 쓰는글. 암튼 서류 받고, 어떤 일 하는지 알아보고 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영어 시험이 아닐까 싶다. ㅠ.ㅠ 토플 시험볼때 가장 성적이 안 나왔던 부분이 말하기 시험이었는데 조금 발전 했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반년동안 Juddy아줌마 한테 동네 도서관 다니면서 열심히 수다를 떨었는데 그게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하지만 언제나 부담 되는건 사실.

암튼 1주일에 10시간 정도씩 일하고 학비 절반이랑 (3500불 상당) 매달 960불 정도를 받게 되었다. 세금 떼면 900불 정도 수령 예정. 단지 4개월 동안 받는 돈이지만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ㅋ 그리고 열심히 해서 다음학기에도 장학금을 받아야 겠다. (한국식으로 하면 근로 장학금이다. 액수가 한국보다 크지만, 물가도 그만큼 비싸다는거)

이번 학기가 기대된다. ㅋ 영어 많이 늘겠다. 학부 애들한테 시달리면.

워싱턴 다녀오는 길

Posted 2008. 8. 10. 10:40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오늘 Washington D.C.에 다녀왔다.
요즘 푹 빠져버린 만년필 쇼를 워싱턴에서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6시에 기상하여 무려 왕복 6시간의 거리를 달려서 다녀왔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것에 놀랐고, 조금은 가벼운 내 지갑을 보면서 아쉽지만, 그래도 쓸만한 펜 2개를 구해온 사실에 즐거웠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교통량 증가로 인해서 잠시 짜증이 나 있었다. 햇볕은 무척이나 따가운데 피곤까지 겹치니 어느 누가 기분좋게 있을 수 있을까?
안그래도 신호가 걸려서 우울한데 옆을 바라보니 너무 그림같은 풍경이 펼처져 있었다.

어짜피 신호 한번 걸리면 바뀌는데 2분정도 걸리는것을 알아챈 나는 카메라를 잽사게 끄집어 내서 한 컷 (사실은 두컷 찍었는데 그중에 잘 나온 사진으로) 찍어 올려 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참고로 여기는 델라웨어다. 미국의 첫번째 주라고 주장하는 작은 주이다.
기름값이 필라델피아에 비해 싸서 행복했다. 겔런당 15센트 이상 싸다니!!!

이름에 얽힌 사연

Posted 2008. 7. 4. 11:4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내 이름은 홍다우미. 성이 '홍'이고 이름이 '다우미'이다.
어릴적에 나는 왜 내 이름만 3자나 되는지가 궁금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름석자는 자기 성을 포함한 것이고, 나는 순수한 이름만 따져서 3글자라는 것이다.)
수능 모의고사를 볼때도 이름 적는 칸이 3자리 밖에 없어서 성적표에는 언제나'홍다우'라고 찍혀 나왔던 시절에 살아온 나로서는 세상을 참 불편하게 살아 왔었다.

그런 내 이름에 얽힌 스토리도 몇가지 있는데 그냥 생각나서 적어본다.

첫번째 이야기.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회에서 수양회를 가야해서 미리 접수를 해 놨었는데, 그 접수를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대신 해 줘서 생겼었다. 수양회 가기 전주에 교회에 모여서 방배정 결과를 알려 주었는데 남자들 이름을 다 불렀는데 내 이름이 없었다. 접수는 분명히 했었는데. 그래서 선생님께 어쭈어 봤더니 내 이름은 여자방에 들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용히 있다가 여자방에 들어가 봤을것을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당시 중1이었던 나는 그런 말도 안되는 경험을 하기 싫었었다. 아내한테 이 얘기 했었다가 혼나긴 했다. ^^; 지금은 가고 싶냐고? 물론~ 지금은 싫다. 남자방도 싫다. 그냥 부부방 줘요!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이 여자이름 같긴 한가보다. 물론 나는 항상 주장하곤 한다. 내 이름이 최초이니 무조건 남자 이름이라고. 하지만 네이버, 다음, 구글을 하다보면 '다우미'란 이름을 가지거나 애칭을 쓰는 사람은 모두 여자다. 흠.. 분명 내가 처음인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여자란게 좀 어색하긴 하다. 그래도 난 남자다.

두번째 이야기.
누구나 가지게 되는 별명. 그런데 나는 이름덕분에 참 다양한 별명이 있었다. 첫 별명은 홍당무. 보면 알겠지만 이름가지고 만든 단순한 별명이다. '다'에다가 '우'자의 'ㅇ'을 뭍이고, '미'자의 'ㅁ'을 'ㅜ'에 붙여 놓은거다. 그게 내 첫 별명이었다. 그리고 국민학교때 선생님이 '다듬이돌'이란 별명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당시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도 문제선생인 듯. 아동 학대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자로 끝나는 3음절 단어는 다 내 차지였다. 아.. 그러구 보니 국민학교 시절 '다리미'란 별명도 있었는데 까묵었다. 암튼 그당시 '미'짜로 끝나는 단어중에 지금도 기억남는건 '두루미', '바구미'가 있는데 그중에 '바구미'는 지금도 약간 변형되어 내 친구 영탁이는 나를보고 '굼바'라고 부른다

세번째 이야기.
내 이름은 '한글'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 뜻은 '~답다'의 명사형으로 어떤것의 이상향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내가 생각해도 내 아버지께서는 나에대한 기대가 무척이나 크셨나 보다. 암튼 이 이름에 대해서 중학교 1학년때 한문 선생님께서는 필히 한자로 같은 뜻이 있는 이름을 지어 주시겠노라고 하셨지만 중학교를 졸업할때쯤 선생님께서는 그런 한자는 없다고 하시며 포기 선언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행이다. 그때 선생님의 호언 장담에 친구들이 장난삼아 음율만 맞추어 지어준 이름이 많을'多', 비'雨', 아름다울'美' 였다.

이름 덕분에 생긴 에피소드.
오늘은 여기까지.

6.25

Posted 2008. 6. 25. 01:0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아아~ 잊으랴 어찌우리 그날을...

오늘이 무슨날인줄 아는사람???
그렇습니다~ 오늘은 6.25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날이라고들 하죠.
사실 6.25일이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날은 아닙니다.
민족의 비극은 일제시대를 지나서 독립을 하게 될 즈음하여 소련의 힘을 우습게 보던 미국이 부랴부랴 한반도를 반토막 내서 나누어 놓았던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고 6.25는 그 결과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의 최 우방이라 생각되는 미국의 어이없는 바보짓 덕분에 우리는 나라가 두쪽나 버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역사공부고, 그다음으로 6.25는 내 친구녀석 생일. 조준희라고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까지 줄창 같이 다닌 녀석 생일. 그러니까 생일축하한다 준희야.

그리고 2005년 이래로 나한테 앞의 두가지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생겼으니 그건 바로 지원이랑 다우미가 결혼한 날이라는 것이지!!!! 여기서 잠깐. 왜 6.25에 결혼했냐고?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냐고? 흠... 솔직히 말해서 2005년 6월 25일은 토요일이었어. 그리고 울 색시가 미국서 공부를 하다가 졸업식 하고 오셔서 잠시나마 결혼 준비할 시간을 가지려면 그때쯤이 가장 적당 했다는 사실. 덕분에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되었다는 사실!

참 우여 곡절끝에 결혼한 우리다.
결혼 스토리 말해주면 미국 사람들 마져도 드라마틱 하게 결혼했다고 꺅꺅 거린다구요.
나는 죽어도 결혼 안 하거나, 하게되면 35세 이후에나 하겠다고 맹세까지 했던 지원이를 20대 중반에 결혼시켜버린 처가의 영웅이 되었고, 울 지원이는 죽어도 공부 안 하겠다고 우겨대던 신랑을 미국에서 석사를 하게 만들어서 시댁의 영웅이 되었지. 우리 민족에게는 6.25가 분단의 골을 깊게 파버린 가슴아픈 날이 되었지만, 우리 두 가정에게는 6.25는 두사람이 함께, 두 가정이 함께, 그리고 내 주위의 모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 날이야. 사실 어떻게 보면 내 생일보다도 더 기쁜날.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두사람, 올 결혼기념일에도 또 떨어져 있게 되었어. ㅠ.ㅠ

작년에는 지원이 학회 때문에, 올해는 지원이 연구 때문에.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내가 지원이 나쁘게 만든거 같은데... 사실 작년엔 내가 따라가지 못할 분위기 였지만, 올해는 나도 내 사정 때문에 혼자 미국 남아 있는거니 내 탓이 더 크지.) 그래서 너무 아쉬워서 이렇게 그날을 기념하는 글을 남겨요.

이제는 둘이 떨어져 있던 날보다 함께한 날이 더 많아져 가네. 전에는 떨어져 있던것이 더 익숙했는데, 이제는 떨어져 있는것이 어색해진 우리. 이 방학이 어여 끝나서 다시 함께할 시간을 기다리면서 내 색시를 기다립니다.

으.. 공부

Posted 2008. 6. 22. 12:0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솔직히 공부는 내 취미가 아니다.
오죽하면 내가 미국에서 석사를 시작하고, 그 공부를 따라가니 울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적을 보았다고 놀라셨을까? 암튼 나는 공부를 참 싫어한다. 아니, 누군가한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배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리고 한국에는 참 가르칠 줄 모르는 분들이 교편을 많이도 잡고 계신다.

내 전공하고 전혀 상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참 좋아하던 과목이 있다. 그건 국사.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긴다. 그 국사란 것이 중학교 2, 3학년때 배운 것으로 대학 입시때 까지 써 먹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난 그 시간에 '국사'만 배운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서 현대를 읽는 눈을 배웠던 것 같다. 다시한번 당시 국사선생님이였던 '이종호'선생님께 참 감사드린다.

요번에 대학원에 와서도 여러 type의 교수님들을 만났다. 몇몇 분들은 교수'님'이란 호칭으로 부르고, 몇몇 분들은 그냥 교수라고 호칭하고 산다. 여기서 '님'이란 호칭을 붙여 드리는 분들을 보면 그분들 참 존경할 만 하다. 학생들한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노력하시는게 내 눈에도 비춰질 정도니 말이다. 그분들의 가르침이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공부 하고 있지도 못할 듯 하다.

여태 대학원 다니면서 5과목을 끝냈다. 5과목을 끝내면서 놀라운것은 난 참 모른다는 것이다. -도데체 모르면서도 5과목중 4과목을 A 받는건 먼지 모르겠다. - 분명한건 내가 대학교 4년동안 참으로 공부를 안 했다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 학기초마다 나는 홍역을 치루곤 한다.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가정하고 지나가는 교수님들의 수업 속에서, 그 기본적인 것들을 내것으로 하기 위해서 하는 몸부림은 참 참담하다. 지금도 교수님 한분이랑 아나로그 회로에 대해서 공부 중이다. 앞으로 할 만한 프로젝트를 위해서 기초 다지기 작업중이다. 그런데 이거 대학 다닐때 배워 놨던건데, 그떄 이 과목도 엉망으로 들어놔서 내 기억에 C-아니면 D+ 정도로 때우고 끝냈던 과목 같다. 이녀석을 다시 책을 붙잡고 공부 하자니 모든것이 새롭다. 단지 그때와 다른것이 있다면, 한글로 된 책을 보면서도 이해 못 했었는데 지금은 영어로 된 책을 읽으면서 이해를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중간중간 이해를 못해서 울쌍 지을때가 많긴 하다.- 그래도 힘들긴 하다. 수업이 아니라 내 스스로 공부하고, 그 공부한 내용으로 교수님과 대화를 해 나가야 한다는것이 엄청난 부담이긴 하다.

앞으로 대략 3학기를 더 들어야 할 듯 하다. 앞의 두과목이 비자 문제가 풀리기 전에 들은 수업이라서 이 6학점은 버려야 할런지도 모른다. 한국에 바로 돌아간다면 전혀 문제 없을텐데, 미국에 몇년 더 있을 계획인지라 이게 나한테 큰 방해가 되긴 한다. 암튼 이 3학기 동안 또 내가 안 해 본것들을 해 나가야 한다. 조금 두렵긴 하다. 원래 예정에 없던 논문도 써 봐야 할 것 같다. 이 두렵고 싫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은 다름아닌 내 색시 지원이다. 오죽하면 울 어머니는 내가 지원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 싫어하는 공부도 같이 한다고 놀리실까. 그런데 지금 지원이가 옆에 없어서 능률이 잘 안 오른다. 아무말 없이 옆에서 공부만 같이 해도 힘이되는데. 오늘따라 지원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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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람 집에 놀러가다

Posted 2008. 6. 9. 09:3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사실 지원이 교수님댁에 놀러 가 본 적은 있지만
(파티에 초대 되서 가긴 했지만 놀러가는 기분 보다는 뭔가 의무감에 가는 것 같은 느낌?)
혼자서 미국사람 집에 가보긴 처음 쩝.

사실 지난주에 교회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언 여자가 말을 걸어 오길래 냉큼냉킁 말했었는데
오늘은 자기 모임있어서 간다고 같이 가자고 해서 얼떨결에 따라 갔었다.
알고보니 어린이 사역을 하는 목사님 댁에서 모임이 었다.

미국에 있는동안 항상 지원이가 대화를 주도 했기 때문에 난 그냥 듣고만 있었는데
온통 미국사람들 속에 싸여 있다보니 ^^;
무진장 긴장되고 무진장 힘들었네요

여러명 있었는데, 그사람들 보니 역히 한국 사람들이랑 다른 문화구나 싶기도 하고.
집에 가자마자 목사님이 권하는 알콜?
어짜피 입에도 안 대는 알콜이니 pass하고 Ice Tea마시긴 했는데, 말로만 듣던 예배후 음주를 즐기는 목사님 모습이 신선 그 자체! ㅋ 문화의 차이는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들과 여러가지 이야기 나눴는데 백인들도 참 소란스럽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휴~ 그나저나 사람이름 외우는데 무진장 약한 난 이제 저사람들 이름 어케 다 외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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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사진은 그 집이랑, 집 앞에서 본 꽃이다.
아직은 사진 같이 찍자고 하기엔 부끄러운... 소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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