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hone 3G를 처음 구경해 보다

Posted 2008. 7. 15. 03:23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요즘 미국은 iPhone 3G가 새롭게 나와서 난리다.
기계 좋아하는 나 이지만, AT&T에서만 발매하는 관계로 무시하고 살고 있는 중.

그러던중 우연치 않게 새롭게 나온 iPhone을 보게 되었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Judi 아줌마 만나서 영어공부 하고 난 다음에 점심 먹으러 피자집으로 갔다.
밥을 먹고 나니까 너무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옆집으로 커피 마시러 들어왔다. (무려 2.34불이나 주고 아메리카노 마셨다. 평소 생각하면 과소비다. 한국 생각하면 무진장 싸다고 하겠지만 여긴 밥값 비싸서 밥사먹고 커피까지 마시면 한끼에 1만원돈 훌쩍이다.) 무려 2.34불이나 주고 마시는 커피 이기에~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 커피샵에서 뭉개면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지원이는 이런데서 어떻게 공부가 되냐고 하지만, 나는 어디서나 공부가 가능하다. 심지어 길거리에 쭈구리고 앉아서도 보고 싶은건 다 본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어떤 아져씨 - 거의 울 아버지 보다 조금 더 나이 드신 듯 하신 -가 내 iPod Touch를 보면서 iPhone이냐고 물어 보시더군. 그러면서 이런 저런거 물어 보시는데 나이 드신분이 새로운 전화기 사시고 즐거워 하는 모습 보면서 정말 미국에서 iPhone이 인기가 대단하긴 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재미있는게 지원이가 한국 가고 난 다음에 내가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는 관계로 미국 사람들과 대화 할 기회가 많이 늘어난것 같다. 지원이 있으면 항상 지원이가 다 해결하고, 난 조용했었으니까. 내가 이러고 다니니 지원이는 방학 끝나고 나면 내 영어실력 많이 늘었을꺼 같다고 한다. 난 도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렸을때 부터 영어할때 두려움 같은건 없었다. 말도 안되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나 이기 때문에 영어밖에 못하는 미국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하며, 한국말도 잘하고 영어도 이정도로 잘 하는 내가 더 대단하다는 자부심으로 부끄러운것 모르고 영어 사용하고 있다. ㅋ

그래도 이렇게 커피샵에서 옆에 앉은 아저씨랑 이런저런 얘기 하는건 즐겁다~
난 뻔뻔 하니까!!!

오래된 필름을 현상하며

Posted 2008. 7. 8. 03:05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어제 오래전 부터 카메라에 들어있던 필름을 꺼내어 현상을 했다.
카메라도 참 오래된 녀석이지. 나보다는 젊겠지만 나와 같이 나이를 들어가는 카메라.
이 카메라 기종이 1987년도 부터 생산이 시작 되었으니 대략 20년 정도 된 카메라 일 듯 하다.

프린트된 사진을 보니 첫 사진은 아틀란틱 시티에서 찍은 사진. 지원이 친구가 와서 함꼐 찍혀 있으니 거의 1년 반? 그정도 시간이 흘러간 필름이었다. 중간에 필름에 빛도 들어가 버리고 해서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몇장 있었는데 3장만 올려 보려고 한다.

두장은 아틀란틱 시티에서 찍은 사진.
지원이랑 미국와서 바닷가에 간 것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지원이 친구가 놀러온 덕분에 대서양으로 놀러 갔다. 원래 아틀란틱 시티는 동부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인 도박장이 있는 곳이다. 뉴욕이나 필라델피아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도박을 하고 싶을때 가는 곳이다. 개인적으로 도박장을 싫어 해서 별로 가고 싶지는 않지만, 도박장 구경도 못 해보셨던 순진한 두 처자 때문에 방문한 곳. (나는 영어 같이 배우던 동생들과 한번 가 보긴 했었다.)
바다에서 찍은 사진중 맘에 드는 컷이 있다.

한장은 지원이 독사진. 바다를 배경으로 한 모습이 참 아름답다. (얼씨구 자기 색시라고 너무 하는거 아냐? 그래도 이뻐 보이는걸 어쩌란 말이냐? 이래서 천생연분인가 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몰래 찍은 아내, 지원







































한가지 아쉽다면 조금더 낮추어서 발 아래쪽으로 땅이 더 나왔으면 했다는거.
아직까지는 실력 부족. (사실은 몰래 찍은 사진이다. 망원으로 당겨 찍는동안 살짝 위로 올라간듯)

그 다음 사진은 친구랑 둘이 찍어준 사진. 그 친구는 그때 이후로 못 만나고 있다.
아 미국은 넓고도 넓어라. 그 친구는 (은경이지?) 지금 한국에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원과 은경























마지막 사진은 지원이랑 필라델피아에서 필름 페스티벌 할때 공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정말 오랜만에 둘이서 시내 나들이를 했었다. (공부에 지친 두 사람에게 단비 같았던 시간이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있었는데 너무 평화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저 있었다. 그날따라 가져간 렌즈가 35mm 렌즈 하나였던지라, 망원으로 찍고 싶었던 사진을 광각으로 찍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맘에 꼭 드는 사진이 나와 버렸다. 개인적으로 제목을 붙여 보라고 한다면 이렇게 붙이고 싶다. "개, 꽃향기에 취하다."

개, 꽃향기에 취하다.

개, 꽃향기에 취하다



사실 필름 하나를 더 맡겼는데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half camera'를 작업자가 몰라서 설명해주고 오느라 찾아오지를 못했다. 하지만 친절한 직원이 재미난거 배웠다고 신나해서 웃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있다가 저녁에 가서 찾아올 것이다.

오랜만에 느끼는 필름의 즐거움. 찍을때 마다 돈이 든다는것과, 가끔 너무 오래 방치된다는 것 빼고는 필름의 매력에 다시한번 빠져든다. 가끔은 가볍게 필름 카메라만 들고 다녀볼까?

Ps. 사진을 누르시면 조금 더 큰 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사진은 직접 눌러 보세요.



이름에 얽힌 사연

Posted 2008. 7. 4. 11:4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내 이름은 홍다우미. 성이 '홍'이고 이름이 '다우미'이다.
어릴적에 나는 왜 내 이름만 3자나 되는지가 궁금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름석자는 자기 성을 포함한 것이고, 나는 순수한 이름만 따져서 3글자라는 것이다.)
수능 모의고사를 볼때도 이름 적는 칸이 3자리 밖에 없어서 성적표에는 언제나'홍다우'라고 찍혀 나왔던 시절에 살아온 나로서는 세상을 참 불편하게 살아 왔었다.

그런 내 이름에 얽힌 스토리도 몇가지 있는데 그냥 생각나서 적어본다.

첫번째 이야기.
중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회에서 수양회를 가야해서 미리 접수를 해 놨었는데, 그 접수를 내가 직접 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대신 해 줘서 생겼었다. 수양회 가기 전주에 교회에 모여서 방배정 결과를 알려 주었는데 남자들 이름을 다 불렀는데 내 이름이 없었다. 접수는 분명히 했었는데. 그래서 선생님께 어쭈어 봤더니 내 이름은 여자방에 들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용히 있다가 여자방에 들어가 봤을것을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당시 중1이었던 나는 그런 말도 안되는 경험을 하기 싫었었다. 아내한테 이 얘기 했었다가 혼나긴 했다. ^^; 지금은 가고 싶냐고? 물론~ 지금은 싫다. 남자방도 싫다. 그냥 부부방 줘요!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이 여자이름 같긴 한가보다. 물론 나는 항상 주장하곤 한다. 내 이름이 최초이니 무조건 남자 이름이라고. 하지만 네이버, 다음, 구글을 하다보면 '다우미'란 이름을 가지거나 애칭을 쓰는 사람은 모두 여자다. 흠.. 분명 내가 처음인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여자란게 좀 어색하긴 하다. 그래도 난 남자다.

두번째 이야기.
누구나 가지게 되는 별명. 그런데 나는 이름덕분에 참 다양한 별명이 있었다. 첫 별명은 홍당무. 보면 알겠지만 이름가지고 만든 단순한 별명이다. '다'에다가 '우'자의 'ㅇ'을 뭍이고, '미'자의 'ㅁ'을 'ㅜ'에 붙여 놓은거다. 그게 내 첫 별명이었다. 그리고 국민학교때 선생님이 '다듬이돌'이란 별명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당시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선생님도 문제선생인 듯. 아동 학대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자로 끝나는 3음절 단어는 다 내 차지였다. 아.. 그러구 보니 국민학교 시절 '다리미'란 별명도 있었는데 까묵었다. 암튼 그당시 '미'짜로 끝나는 단어중에 지금도 기억남는건 '두루미', '바구미'가 있는데 그중에 '바구미'는 지금도 약간 변형되어 내 친구 영탁이는 나를보고 '굼바'라고 부른다

세번째 이야기.
내 이름은 '한글'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 뜻은 '~답다'의 명사형으로 어떤것의 이상향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내가 생각해도 내 아버지께서는 나에대한 기대가 무척이나 크셨나 보다. 암튼 이 이름에 대해서 중학교 1학년때 한문 선생님께서는 필히 한자로 같은 뜻이 있는 이름을 지어 주시겠노라고 하셨지만 중학교를 졸업할때쯤 선생님께서는 그런 한자는 없다고 하시며 포기 선언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행이다. 그때 선생님의 호언 장담에 친구들이 장난삼아 음율만 맞추어 지어준 이름이 많을'多', 비'雨', 아름다울'美' 였다.

이름 덕분에 생긴 에피소드.
오늘은 여기까지.

6.25

Posted 2008. 6. 25. 01:0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아아~ 잊으랴 어찌우리 그날을...

오늘이 무슨날인줄 아는사람???
그렇습니다~ 오늘은 6.25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날이라고들 하죠.
사실 6.25일이 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날은 아닙니다.
민족의 비극은 일제시대를 지나서 독립을 하게 될 즈음하여 소련의 힘을 우습게 보던 미국이 부랴부랴 한반도를 반토막 내서 나누어 놓았던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고 6.25는 그 결과일 뿐입니다. 결국 우리의 최 우방이라 생각되는 미국의 어이없는 바보짓 덕분에 우리는 나라가 두쪽나 버렸습니다.

여기까지는 역사공부고, 그다음으로 6.25는 내 친구녀석 생일. 조준희라고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 까지 줄창 같이 다닌 녀석 생일. 그러니까 생일축하한다 준희야.

그리고 2005년 이래로 나한테 앞의 두가지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생겼으니 그건 바로 지원이랑 다우미가 결혼한 날이라는 것이지!!!! 여기서 잠깐. 왜 6.25에 결혼했냐고?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냐고? 흠... 솔직히 말해서 2005년 6월 25일은 토요일이었어. 그리고 울 색시가 미국서 공부를 하다가 졸업식 하고 오셔서 잠시나마 결혼 준비할 시간을 가지려면 그때쯤이 가장 적당 했다는 사실. 덕분에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되었다는 사실!

참 우여 곡절끝에 결혼한 우리다.
결혼 스토리 말해주면 미국 사람들 마져도 드라마틱 하게 결혼했다고 꺅꺅 거린다구요.
나는 죽어도 결혼 안 하거나, 하게되면 35세 이후에나 하겠다고 맹세까지 했던 지원이를 20대 중반에 결혼시켜버린 처가의 영웅이 되었고, 울 지원이는 죽어도 공부 안 하겠다고 우겨대던 신랑을 미국에서 석사를 하게 만들어서 시댁의 영웅이 되었지. 우리 민족에게는 6.25가 분단의 골을 깊게 파버린 가슴아픈 날이 되었지만, 우리 두 가정에게는 6.25는 두사람이 함께, 두 가정이 함께, 그리고 내 주위의 모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 날이야. 사실 어떻게 보면 내 생일보다도 더 기쁜날.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 두사람, 올 결혼기념일에도 또 떨어져 있게 되었어. ㅠ.ㅠ

작년에는 지원이 학회 때문에, 올해는 지원이 연구 때문에.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내가 지원이 나쁘게 만든거 같은데... 사실 작년엔 내가 따라가지 못할 분위기 였지만, 올해는 나도 내 사정 때문에 혼자 미국 남아 있는거니 내 탓이 더 크지.) 그래서 너무 아쉬워서 이렇게 그날을 기념하는 글을 남겨요.

이제는 둘이 떨어져 있던 날보다 함께한 날이 더 많아져 가네. 전에는 떨어져 있던것이 더 익숙했는데, 이제는 떨어져 있는것이 어색해진 우리. 이 방학이 어여 끝나서 다시 함께할 시간을 기다리면서 내 색시를 기다립니다.

으.. 공부

Posted 2008. 6. 22. 12:04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솔직히 공부는 내 취미가 아니다.
오죽하면 내가 미국에서 석사를 시작하고, 그 공부를 따라가니 울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적을 보았다고 놀라셨을까? 암튼 나는 공부를 참 싫어한다. 아니, 누군가한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배우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그리고 한국에는 참 가르칠 줄 모르는 분들이 교편을 많이도 잡고 계신다.

내 전공하고 전혀 상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참 좋아하던 과목이 있다. 그건 국사.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긴다. 그 국사란 것이 중학교 2, 3학년때 배운 것으로 대학 입시때 까지 써 먹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난 그 시간에 '국사'만 배운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서 현대를 읽는 눈을 배웠던 것 같다. 다시한번 당시 국사선생님이였던 '이종호'선생님께 참 감사드린다.

요번에 대학원에 와서도 여러 type의 교수님들을 만났다. 몇몇 분들은 교수'님'이란 호칭으로 부르고, 몇몇 분들은 그냥 교수라고 호칭하고 산다. 여기서 '님'이란 호칭을 붙여 드리는 분들을 보면 그분들 참 존경할 만 하다. 학생들한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 노력하시는게 내 눈에도 비춰질 정도니 말이다. 그분들의 가르침이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공부 하고 있지도 못할 듯 하다.

여태 대학원 다니면서 5과목을 끝냈다. 5과목을 끝내면서 놀라운것은 난 참 모른다는 것이다. -도데체 모르면서도 5과목중 4과목을 A 받는건 먼지 모르겠다. - 분명한건 내가 대학교 4년동안 참으로 공부를 안 했다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지 매 학기초마다 나는 홍역을 치루곤 한다.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가정하고 지나가는 교수님들의 수업 속에서, 그 기본적인 것들을 내것으로 하기 위해서 하는 몸부림은 참 참담하다. 지금도 교수님 한분이랑 아나로그 회로에 대해서 공부 중이다. 앞으로 할 만한 프로젝트를 위해서 기초 다지기 작업중이다. 그런데 이거 대학 다닐때 배워 놨던건데, 그떄 이 과목도 엉망으로 들어놔서 내 기억에 C-아니면 D+ 정도로 때우고 끝냈던 과목 같다. 이녀석을 다시 책을 붙잡고 공부 하자니 모든것이 새롭다. 단지 그때와 다른것이 있다면, 한글로 된 책을 보면서도 이해 못 했었는데 지금은 영어로 된 책을 읽으면서 이해를 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중간중간 이해를 못해서 울쌍 지을때가 많긴 하다.- 그래도 힘들긴 하다. 수업이 아니라 내 스스로 공부하고, 그 공부한 내용으로 교수님과 대화를 해 나가야 한다는것이 엄청난 부담이긴 하다.

앞으로 대략 3학기를 더 들어야 할 듯 하다. 앞의 두과목이 비자 문제가 풀리기 전에 들은 수업이라서 이 6학점은 버려야 할런지도 모른다. 한국에 바로 돌아간다면 전혀 문제 없을텐데, 미국에 몇년 더 있을 계획인지라 이게 나한테 큰 방해가 되긴 한다. 암튼 이 3학기 동안 또 내가 안 해 본것들을 해 나가야 한다. 조금 두렵긴 하다. 원래 예정에 없던 논문도 써 봐야 할 것 같다. 이 두렵고 싫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원동력은 다름아닌 내 색시 지원이다. 오죽하면 울 어머니는 내가 지원이를 너무 사랑해서 그 싫어하는 공부도 같이 한다고 놀리실까. 그런데 지금 지원이가 옆에 없어서 능률이 잘 안 오른다. 아무말 없이 옆에서 공부만 같이 해도 힘이되는데. 오늘따라 지원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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